덕천군 이후생

덕천군 사우 입구 전경
덕천군 사우 입구 전경

덕천군 이후생은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이다.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자연스럽게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 이후생은 왕족 신분임에도 직접 농사일을 하며 가난한 이웃을 도왔다. 금강이 범람했을 때는 재산을 내어 많은 수재민을 구하는 등 덕행을 실천했던 이후생의 삶과 그를 모시는 덕천군 사우에 대해 살펴본다.

 

효심·우애 깊은 왕자, 가난한 백성 돌보다

덕천군 이후생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이유로 태종은 이후생의 군호(君號)를 지을 때 덕이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는 의미로 ‘덕천(德泉)’이라고 지었다. 이후생의 성정을 잘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하루는 태종의 잔치에서 밥에 벌레가 나와 이를 보고 노한 왕이 음식을 만든 이들을 처벌하려 했다. 그러자 이후생이 나서서 “벌레를 자세히 살펴보니 곡식을 먹는 벌레로서 독충이 아니니 인명에 해롭지 않습니다. 그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간청해 임금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생은 왕자의 신분임에도 논밭에 나가 직접 농사일을 하며 가난한 이웃들을 지성으로 도왔다. 장마로 금강이 범람하며 큰 피해를 본 백성들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이후생은 평소 가난한 백성을 위해 힘쓰며 덕을 쌓았다고 하여 ‘적덕공(積德公)’이라 불렸다.

 

덕천군 사우 묘소
덕천군 사우 묘소

수많은 백성 구한 덕행 기려 세워진 '덕천군 사우'

사우(祠宇)란 조상의 신주를 모셔놓은 집을 의미한다. 사당(祠堂)이 특정한 가문이나 집안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면, 사우는 국가나 향촌에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을 영구히 제사 지내기 위해 설치된다. 과거에는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는 왕의 허락으로 계속 사당에 두고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수많은 백성을 구한 덕천군은 만인의 귀감이 되는 인물로서 그 덕행을 기려 사우에 모시게 된 것이다. 

당초 덕천군 사우는 세종시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어졌지만, 건물이 낡아 1739년에 현재의 세종시 장군면 태산리로 옮겼다. 덕천군 묘소 또한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서문 밖에 있던 것을 1974년 사우가 있는 문중 묘역으로 옮겼다.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분청사기 두 점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1400년대 양반가의 생활 모습과 장례 때 부장품을 묻는 습속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현재는 국립공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덕천군 사우 강당
덕천군 사우 강당

예와 덕, 충효 강조한 덕천군의 뜻을 잇다

덕천군 사우 내 강당에는 덕천군이 후손들에게 남긴 유지(遺志)가 담긴 액자가 걸려있다. 이를 해석하면 ”배우기를 즐기고 예를 숭상하며, 덕을 쌓고 충효를 다하라. 밭을 일구듯 성실히 업을 닦고, 근면하고 소박하게 살며, 언제 나 바르고 정직하게 처신하라”는 의미다. 생전에 덕천군이 추구한 삶의 지향점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왕자의 신분임에도 농사일을 즐기며 어려운 백성을 직접 살폈던 덕천군의 삶은 예의와 덕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의 바람직한 지식인의 모습으로 평가받는다.

덕천군 사우에서는 매년 음력 11월 10일 전통 제례에 따라 덕천군을 기리는 덕천군 제향 행사가 열린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덕을 쌓고 예를 중시한 덕천군의 삶을 되새기며 스스로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가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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