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일제의 폭압에 항거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이 107주년을 맞는 해다. 세종지역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3일 전의면을 시작으로 조치원을 비롯한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며 한 달 이상 지속됐다. 세종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수욱(李秀郁)과 조치원 만세운동을 이끈 맹의섭(孟義燮) 등 애국지사들의 고귀하고 치열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세종지역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이수욱

이수욱(출처: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이수욱(출처: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이수욱은 1890년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던 조부와 지역의 유학 보급에 매진했던 백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서울을 왕래하며 신학문을 익히고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면서 성장했다. 1919년, 이수욱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3·1운동의 발발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3월 6일 집으로 돌아오면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심하고 곧바로 추경춘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후 3월 7일 박성교의 집에서 태극기 제작과 장날 만세운동 개시 등 계획을 구체화한 뒤, 다음날 김봉옥의 집에서 목판본 태극기 150장을 제작했다. 1919년 3월 13일은 전의면 읍내리의 장날이었다. 이수욱을 비롯한 주도자들은 오전 9시경 시장으로 통하는 길목인 갈정리 언덕에서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이윽고 이수욱과 정오경의 연설을 시작으로 150여 명의 군중이 전의장터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개시했다. 세종지역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이수욱이 주도한 전의3·1만세운동은 전의면에서만 애국지사 17명이 투옥될 정도로 대규모로 진행됐다. 만세운동의 열기는 전의면 소정리, 연기군 동면을 비롯해 청주, 공주 등 인근지역으로 확산됐다. 특히 세종지역에서만 한 달 이상 지속되며, 3·1운동 절정기인 3월말부터 4월초에 집중됐다. 지역 내 모든 면에서 9,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수욱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후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항소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징역 1년 6월을 다시 받았다. 그해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수욱의 목소리는 상고취의(상고 이유)로 남아있다.

“조선 민족이 조선의 독립 소식을 듣고 기쁨을 감추기 못해

열성으로 만세를 부른 것은 인정(人情)으로 발발한 것이다.

따라서 부끄러울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인민의 안녕을 해하는 일도 아니다”

 


독립운동가 · 언론인 · 행정가로 일제에 저항한 맹의섭

맹의섭(출처: 마을기록문화관 다담)
맹의섭(출처: 마을기록문화관 다담)

전의장터 만세운동의 주역이 이수욱이었다면, 조치원 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맹의섭이다. 맹의섭은 1891년 천안시 목천면 중실리의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가세가 기울면서 1913년 조치원으로 이주했다. 이후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지방 행정가로 세종 지역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1913년 조치원 침산리로 이주한 맹의섭은 생계유지를 위해 연기군 북일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약 1년간 근무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배움을 갈망했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조치원 시장 내 야학을 개설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당시 연기군수였던 고희준을 도와 1915년 조치원공립보통학교(현 대동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1910년대에는 청년들 사이에서 나라 잃은 서러움과 암울한 장래에 절망하는 무기력함이 만연해 있었다. 맹의섭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뜻있는 동지들과 힘을 모아 1918년 3월 1일 연기청년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으로 활약했다. 

이듬해인 1919년 3월, 맹의섭은 연기청년회를 중심으로 조치원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여하고자 상경했던 그는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독립만세를 목격하고 시가행진에 동참했다. 이후 독립선언서 500여 매를 몰래 입수해 독립유공자 김재형과 함께 조치원 인근지역에 은밀하게 배포했다. 

연기청년회가 주도한 조치원 만세운동은 3월 23일과 28일, 30일 등 3차례에 걸쳐 진행되면서 강내면, 문의면, 보은읍 등의 만세운동으로 번졌다. 이로 인해 맹의섭은 일제의 감시 대상인물로 지목돼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1922년부터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맹의섭은 출옥 후 연기청년회가 해체되자 연기청년회관을 활용해 1924년 4월 연청학원을 설립하고 21년간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1925년에는 충청지역의 언론인들을 규합해 ‘호서기자동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탄압과 비리를 보도하는 등 저항을 이어갔다.

광복 이후에는 1947년 7월 미군정청으로부터 초대 조치원읍장에 임명되어 1952년 5월까지 재직했다. 정부 수립기, 한국전쟁 등 혼란했던 시기에 조치원 지역의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조치원농업학교, 명동초등학교, 조치원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역의 교육 인프라를 구성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매년 전의면서 태극함성 재현하며 자긍심 키워

자주독립을 염원했던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의3·1만세운동은 매년 전의역 앞과 전의면 만세길 일원에서 재현된다.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처음 열린 뒤로 매년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지역 주민, 학생들이 모여 진행한다. 기획전시와 역사퀴즈 이벤트 등이 함께 마련되어 학생들이 지역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을 키우는 교육의 장 역할을 하고 있다.

조치원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의 추진 경위와 과정은 맹의섭이 1972년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저술한 회고록 ‘추운실기’를통해 소상히 전해지고 있다. 그와 동지들이 일제에 저항했던다양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당시 조치원의 시대상과 주민생활상 등도 엿볼 수 있어 ‘조치원 근현대사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2025년 전의3.1만세운동 재현행사에서 만세를 외치는 학생과 주민들
2025년 전의3.1만세운동 재현행사에서 만세를 외치는 학생과 주민들

<참고> 대전세종지역학 기획총서 제2권 「세종 인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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