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어서각
어서각(御書閣)은 왕이 직접 쓴 글씨나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임금이 하사한 친필 묵서, 현판, 서지, 교지(명령서) 등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곳이다. 전국 곳곳에 어서각이 남아 있지만, 세종의 어서각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대부분의 어서각이 특정 왕이 내린 현판이나 교지 한 점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데 비해, 여러 왕의 필적이 함께 모셔졌다는 점에서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41호 어서각의 기원과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본다.
태조가 직접 쓴 ‘왕지’ 모신 어서각
1395년, 조선을 건립한 태조 이성계는 개국 과정에서 공을 세운 강순룡에게 ‘특진보국숭록대부 재령백’에 명한다는 내용의 왕지(王旨)를 내렸다. 강순룡은 고려 충혜왕 때 급제해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특진보국숭록대부는 정1품에 해당하는 관직이고 재령백은 직위의 명칭이다. 강순룡 왕지는 태조의 옥새가 찍힌 가장 오래된 문서 가운데 하나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강순룡은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오빠이기도 하다.
강순룡의 후손들은 이 왕지를 간직해 오다가 영조 때에 이르러 다시 왕에게 올리게 된다. 영조는 감탄의 뜻을 담아 발문을 쓰고, 왕의 글씨를 모실 건물을 세우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때 연기군 남면 고정리(현재 세종시 아름동일대)에 세워진 건물이 오늘날의 어서각이다. 현재 태조가 내린 왕지의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세종 어서각에는 이를 정밀하게 옮긴 영인본이 보관되어 있다.
어서각에는 태조의 왕지뿐만 아니라 영조, 정조, 고종의 글씨도 함께 봉안되어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정조는 신덕왕후의 옛 집터(황해도 곡산)에 세운 비석에 ‘성후사제구기(聖后私第舊基, 성스러운 왕비의 친정집 옛터)’라는 비명을 직접 썼고 고종은 어서각을 중수(보수)한 후에 직접 사적(事跡)을 써서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몇 차례 보수·복원공사를 거치면서 현재는 태조 왕지를 제외하고 영조의 발문과 정조·고종의 친서는 실물 소재를 확인하기 어렵다.
어서 봉안 구조·방식 보존··· 건축사적 가치 높아
세종시 어서각은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정면으로 보면 지금의 현판에 해당하는 어서각 편액이 있고, 내부에는 태조 친필 영인본과 어서각 건립 배경, 중수 내력 등을 기록한 어서각기, 어서각 중수기 현판이 걸려 있다. 어서각은 단칸에 가까운 소규모 건물이지만 어서를 봉안하는 본래 용도에 맞춘 구조와 방식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본래 어서각은 왕의 글씨를 엄숙히 모시는 공간인 만큼 마을과 거리를 두고 세워진다. 세종시의 어서각 또한 원래는 연기군 남면 고정리의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서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과 함께 어서각 주변은 아름뜰근린공원과 아파트 단지, 산책로가 어우러진 생활공간으로 바뀌게 됐다. 일상과 가까운 속에서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태조와 신덕왕후에 얽힌 버들잎 설화도 담겨
어서각역사공원 입구에는 버들잎과 조롱박, 우물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태조 이성계와 강순룡의 여동생 신덕왕후에 얽힌 설화를 담은 조형물이다.
설화에 따르면 이성계는 무술을 연마하던 중 물을 마시러 왔다가 강순룡의 여동생과 마주친다. 그녀에게 물을 청하자, 강순룡의 여동생은 표주박에 물을 뜨고 버들잎을 띄워 건네준다. 까닭을 물어보는 이성계에게 그녀는 급히 마시다 탈이 날까 염려되어 천천히 마시도록 버들잎을 띄웠다고 대답한다. 이유를 알게 된 이성계는 그녀의 배려와 지혜에 깊이 감탄한다. 훗날 그녀는 이성계와 결혼해 신덕왕후가 된다.
일상과 가까운 곳에서 오랜 역사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는 어서각에서 새해를 기운차게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